쓰러져 가는 나무를 떠받치는 한 젊은이
이순신(1545~1598년) 장군의 어머니의 꿈입니다.
“한 젊은 남자가 쓰러져 가는 나무를 떠받치는 꿈입니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부근인 건천동에서 태어납니다.
22세에 무과에 도전하였으나 떨어지고, 32세인 1576년 무과에 합격합니다. 첫 발령지는 함경도 동구비보(‘삼수갑산’의 삼수라는 고을)였고 직책은 권관(종9품)이었습니다. 49세인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인 종2품에 오릅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자,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이틀 후인 4월 15일,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요청을 통해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게 됩니다. 당시, 전라좌수사(정3품) 이순신은 출정에 앞서 선조에게 전쟁에 임하는 결의를 밝힙니다.
‘원컨대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일이나마 씻으려 하옵거니와,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는 신이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 이르까지 23전 23승리로 쓰러져 가는 조선을 구합니다. 이순신의 마지막이 된 노량해전을 앞두고 하늘에 제사를 지냅니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주소서.’
승리는 하였지만, 이순신도 총에 맞아 쓰러집니다.
‘싸움이 급하니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그가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만들었고, 전쟁 중에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난중일기>를 씁니다. 전쟁 중에 어머니와 아들을 잃었고, 파직과 고문을 당하고 백의종군을 합니다.
역사가 황현필은 평합니다.
‘이순신이 없었으면 430년 전 조선은 망했을 것이고, 우리는 300년 더 일찍 일본의 식민지배를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일본의 사토 테츠타로(일본의 전 해군 이론가)는 이순신과 영국의 넬슨을 이렇게 비교합니다.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덕분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해군제독)는 러일전쟁 승리 직후 축사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